손기정
전설적인 마라토너 손기정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의 대표로 참가했고, 그곳에서 한국인 운동선수로서 첫 올림픽 금메달을 얻었다.
손기정의 업적은 국민의 자부심과 호응을 받았으나, 그 당시의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그의 승리가 순전히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1936년 당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 였기 때문에 손기정은 자신의 국가 대신 일본 국기 아래에서 경기를 뛰었다.
손기정의 우승 후, 조선인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손기정은 무거운 마음으로 시상대에 올랐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금메달을 받으면서도 그의 내면은 슬픔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손기정의 개인적인 생애 역시 많은 시련을 겪었다.
그의 가족사는 복잡하고 아픈 기억들로 가득하다. 1935년, 손기정은 아버지 손인석을 잃었고, 불과 몇 년 후인 1941년에는 어머니 김복녀를 심장마비로 인해 잃어버렸다.
이러한 가정의 큰 변화와 함께, 손기정은 1939년에 단거리 육상 선수 출신인 강복신과 결혼했지만, 그의 행복한 결혼 생활도 오래 가지 못했다.
그들의 결혼은 강복신이 간염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5년만에 종결되었다. 그들은 두 자녀를 두었는데, 딸인 손문영과 아들 손정인이다.
손정인은 일본에서 교포들의 지원 활동을 통해 많은 일을 해왔고, 그의 활동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도 빛을 발했다.
손기정의 외손자, 이준승은 현재 손기정 기념관의 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이준승의 아버지인 이창훈 역시 마라토너였다. 1958년 도쿄 아시안 게임에서 그는 금메달을 획득, 두대 연속 마라토너의 금메달 승리를 기록하게 되었다.
손기정 재혼
손기정은 김원봉과 재혼하게 되었는데, 그녀의 아들 김원권은 세단뛰기에서 세계 최고의 기록을 갖고 있는 육상선수였다.
이러한 재혼으로 인해 손기정은 다양한 사업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으나, 그의 사업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이후, 그는 금전적 문제로 인해 법적인 문제에 휘말리게 되었고, 그로 인해 두 번째 부인과도 이혼의 고배를 마셨다. 1972년, 그의 부인 김원봉도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그의 인생은 다시 한번 칩거하는 고독한 시기로 들어가게 되었다.